- 스티븐 그린블렛
르네상스와 근대는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 되었을까? 세계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바꾼 변화의 시작을 단지 어떤 인물과 사건으로 특정 지을 수 없겠지만 이 책에서는 다양한 원인과 사건 중에서 교황청 소속의 필사가 포조 브라촐리니와 그가 독일의 외딴 수도원에서 발견한 고대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라는 책을 가지고 중세 기독교 문화의 굳건한 성채에 어떻게 억압되고 잊혀져가던 그리스와 로마의 유산이 스며들 수 있었는지 밝혀 나가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 포조 브라촐리니는 평범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빼어난 필사 기술과 인문학 - 그 당시 인문학은 그리스. 로마의 잊혀진 책들을 발굴하여 복원하는 것- 과 법학적 지식으로 교황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을 비서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와 기독교 국가간의 분쟁으로 인해 교황이 폐위 되면서 졸지에 실업자가 되고 만다. 그리고 그때 그는 그 자신이 사랑했던 그리스, 로마의 잊혀진 책을 찾으러 전쟁과 천재지변을 피한 오래된 고전들이 남아 있는 외딴 수도원들로 여정을 떠나고 거기서 문제의 책을 발견하게 된다.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전쟁과 천재지변 그리고 양피지를 재활용하기 위한 파손의 위험을 이겨내고 마침내 다시 한번 빛을 보게된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는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시집으로 엮은 책이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그 이전 철학자였던 데미크리토스의 원자론을 이어받아 사물의 본성은 쪼갤 수 없는 원자 - atom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고 삶의 목적을 쾌락의 추구와 고통의 회피로 보았으며 죽음이란 고통 없는 존재의 끝으로 보고 내세에 대한 관념을 거부한 학파로 그들의 주장을 보면 마치 현대 과학의 세계관을 보는 것 같아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에피쿠로스 철학중 이러한 무신론적 세계관은 고대 이래로 많은 종교와 철학에 위협이 되었으며 정치 참여에 소극적이었던 에피쿠로스 학파의 성격과 어우러져 당대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고 특히나 기독교가 지배적이던 중세 시대에는 이단의 사상으로 처벌 받기까지 했다. 이러한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을 폄하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쾌락주의 = 비도덕이라는 등식인데 에피쿠로스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쾌락은 무분별한 육체적 쾌락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하는 것으로 죽음의 공포와 신의 응보로부터 자유로운 만족감과 고요함의 상태이나 이를 마치 디오니소스적인 비이성적 쾌락으로 폄하했던 것이다. 이러한 쾌락에 대한 접근을 미연에 차단함으로써 중세 기독교 문화는 천년간이나 고통의 추구를 선이라고 생각하여 금욕뿐 아니라 자발적 자학을 통한 육체적 고통과 같은 억압과 공포의 문화를 유지할 수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포조는 에피쿠로스 철학의 정수가 담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찾아내어 세상에 전파를 했고 (그렇다고 포조는 이 일로 핍박을 받지는 않았다. 다시 교황청에 복귀해서 성공적인 생활을 수행했고 말년에는 피렌체의 총독으로 부임했다고 한다.)
이 책은 여러번의 필사를 통해 복제되면서 교회의 견제를 받기도 했으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도입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이 그렇다고 해서 현대시대의 베스트셀러처럼 한번에 밀리언 셀러가 되어 갑작스러운 시대의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겠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퍼져나가 토마스 모어, 루터에 앞서 종교 개혁을 이야기 하다 이단으로 처형받은 조르다노 브루노,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예술가들 몽테뉴와 마키아벨리, 갈릴레이등 근대를 열어간 혁신가들에게까지 전해졌고 이러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느리지만 거대한 변화는 끝내 근대를 시작할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본인이 에피큐리언이라고 이야기했던 미국의 대통령 제퍼슨에게까지 이어지게 된다.
미지의 책을 찾아 수도원을 돌아다니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떠오르는 플롯과 주인공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마치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고, 단순한 작가의 상상이 아니라 수많은 사료를 통해 고증이 된 책의 역사, 도서관의 역사등과 같은 다양한 역사적 사실들, 그리고 생생하게 그려진 그당시 필사가들의 삶의 모습, 중세시대 교황청과 피렌체의 생활상등을 접하면서 즐거운 지적 유희를 느낄 수 있게 해준 책. 딱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표지 디자인이 책의 내용과 가치에 비해 좀 허접함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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