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 자런

  그동안 과학자들 자서전을 몇권 읽었는데 그중에 최고라면 역시 올리버 색스의 “온더 무브” 가 아닐까. 모터사이클 애호가로써의 여정에 빗댄 그의 지적 여행기가 무척이나 재미있었고 동성애자로써의 정체성에 대한 고뇌와 사랑 이야기도 감동적이었고, 무엇보다 무너진 사람들에 대한 애정으로 써내려간 인간에 대한 통찰은 아름답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보게 해준 책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기억나는 책은 뇌 과학자 에릭켄델의 “기억의 시대” 인데 저자가 뇌과학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해도 될 만큼 뇌 과학에서 많은 족적을 남겨 그의 일생을 돌이키며 뇌과학의 역사들을 함께 접하는게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그리고는 좋아하는 과학자이자 작가인 리처드 도킨스 자서전도 재미있게 읽었고, 역시 뇌과학자인 마이클 가자니가의 “뇌, 인간의 지도”는 저자의 삶이 너무 평탄하고 성공적이어서 딱히 감흥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예를 들면 이사때문이었나 뭣때문에 돈이 필요했는데 마침 친척한테 거액의 유산을 받는다는 등 ㅋㅋㅋ)

  이 책 “랩걸”은 트위터에서 팔로우하고 있는 번역자분께서 강추하셨던 책이어서 위시리스트에 담아두었다가 잊고 있었는데 마침 얼마전에 유시민씨도 추천했다고 해서 위에 언급한 책들과 같은 내용을 기대하며 읽어봤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조금 실망스러웠다. 

  저자는 주로 식물을 연구하는 과학자 답게 식물의 성장 단계를 빗대어 본인의 과학적 여정을 이야기 하는데, 저자가 소개하는 식물의 성장 과정은  참 경이롭다. 씨앗이 뿌리를 내릴 단 한번의 기회를 기다리며 수년에서 수십년간 땅속에 묻혀 있다 발아하여 대기로 힘차게 새싹을 틔우고, 온갓 역경을 뚫고 자라나 물과 공기를 이용해 햇빛을 당으로 바꾸며 자라나고, 가뭄이나 겨울과 같은 혹독한 시기를 견디어 내어 곤충과 바람의 힘을 이용하여 꽃을 피워내고, 다시 씨앗을 만들어 내며 수십년 수백년을 자라나는 식물의 삶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아프리카 초원들의 동물들만큼이나 강인하고 역동적인 것 같다. 

  저자는 어릴적 대학 과학교수였던 아버지의 실험실을 따라다니면서 자연스럽게 과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이후 열심히 노력해서 석, 박사 과정을 통과하고 실험실 조교를 하다가 평생의 연구 동료- 완벽히 동등한 관계는 아니고 실험실 조수로 일하게 되는- 빌도 만나고 조지아 공대에 20대 중반이라는 어린 나이에 정교수가 되어 과학자로서의 삶을 이어간다. 
  저자와 동료들은 좁은 실험실에서 허구한 날 밤을 지새는 고단한 실험과 연구를 지속하고, 부족한 연구 자금때문에 차나 학교에서 지내기도 하고, 수천 키로미터를 운전해서 탐사 연구와 학회에 참석하는 힘든 과정을 겪어야 했지만 과학적 탐구에 대한 열정과 그 과정에서 마주치는 진실의 순간, 그리고 빌의 도움으로 잘 버티어 나가고, 평생의 단짝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간다. 

  책 전편에서 보여지는 식물의 입장이 되어서 바라보는 식물의 삶과 저자의 식물과 과학에 대한 애정과 열정, 평생의 연구 동료 빌과의 플라토닉한 관계, 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성장하는 모습들이 마음에 와닿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웠던 부분들이 몇가지 있는데 첫번째는 저자의 학생들에 대한 자세이다. 어린 나이에 교수를 시작해서 학생들과의 에피소드도 책에 많이 실려 있는데 학생들의 삶에는 대부분 무관심하거나 무시하는 글들이 많이 나와서 좀 불편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저자의 시련과 아픔에 대해서 공감하기가 좀 어려웠다. 저자는 어찌 되었건 20대 중반에 정교수가 되고, 학문적 성과를 인정 받아 어린 나이에 종신 교수 자리를 얻으며, 남자 친구는 파티에서 만나서 2주만에 동거를 하다 결혼을 하는데 마침 그 남자친구 또한 엄청난 과학자라 마음만 먹으면 어느 대학이든 교수가 될 수도 있어서 저자를 따라 직장을 옮겨 누가 봐도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데, 책에서는 힘들었던 삶에 대해서만 너무 많이 나온다. 그게 교수 초년기에 실적이 부족해서 연구 자금이 떨어질 걱정때문이기도 하고, 아니면 책에서 잠깐씩 언급되는 조울증 때문인것 같기도 한데. 누구나 각자만의 아픔과 불행이 있는 법이겠지만 그래도 저자가 왜 그런지에 대해서 잘 이해가 안됐고,  그런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 주로 빌하고 사이에서 오가는 위악적이고 시니컬한 유머도 딱히 내 취향은 아니어서 이런 부분들이 읽으면서 괴로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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