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틈틈히 읽고 있는 뉴욕타임스 선정 20세기 위대한 책 100권 중의 한권.
부제가 ‘북아일랜드의 살인의 추억’이라고 되어 있어서 무슨 북아일랜드의 연쇄 살인마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읽다 보니 단순한 범죄를 다룬 형사물(?)이 아니라 북아일랜드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아일랜드 재통일을 주장하며 격렬하게 저항했던 준 군사조직 IRA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때 부터 한페이지 한페이지가 너무 흥미 진진해지기 시작한다.
책은 영국의 지원을 받는 개신교, 왕당파 지지자와 독립을 주장하는 카톨릭, 공화주의자들의 극심한 대립으로 혼란스러운 60년대 벨파스트에서 어느날 갑자기 집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수십년간 실종된 10남매의 싱글맘 진 맥콘빌과 그녀의 남겨진 자식들의 이야기와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말 그대로 목숨을 내건 IRA의 젊은 전사들의 무장 투쟁사가 교차되며 진행되다 마지막에 이르러 하나로 교차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절묘한 구성과 허를 찌르는 반전들이 논픽션이 아니라 한편의 영화를 묘사하는 듯하다.
책의 대부분의 분량이 IRA의 무장투쟁에 대한 이야기인데 영국과 왕당파에 맞서 싸우며 총격과 폭동, 폭탄테러를 통해 무고한 시민들의 평화로운 일상과 목숨까지 앗아간 그들의 행위는 도덕적 비판과 법적 처벌이 필요하다고 쉽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추구 했던 대의와 영국 정보부의 치밀하고 악랄했던 공작 행위 -개인적으로는 영화 본시리즈의 트레드 스톤이 떠올랐다-들을 생각해보면 일본의 피식민국으로써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고, 거대 권력에 맞서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민주투사들이 있던 나라의 국민으로써 단순히 폭력으로만 폄하하기는 어려운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과연 폭력적 저항은 모두 나쁜 것일까? 목적이 옳으면 수단이 정의롭지 않아도 되는건가? 그리고 무엇보다 대의를 위해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통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던진 젊은 투사들의 숭고한 행동은 다른 모든 걸 떠나 감동적이기도 했다.
수십년에 걸친 폭력적인 분쟁은 1998년 미국의 중재와 상호간의 지난한 협정을 통해 폭력 행위를 종식하고 향후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독립을 결정하는 길을 열어준 벨파스트 협정으로 종지부를 찍게 되는데, 드디어 폭력이 종식되고 평화가 찾아왔다는 환호와 찬사 뒤에는 완전한 독립을 위해 청춘과 목숨을 바친 IRA의 젊은 전사들의 회한이 남을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참 공감이 갔다. 젊은 시절 IRA의 핵심 지도자로 전사들을 이끌다가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평화 협정을 체결한 신페인당의 당수 제리 아담스는 복잡한 폭력 상태를 해결한 탁월한 정치인일까 아니면 IRA 전사들이 의심하는 것처럼 IRA 전사들의 피와 본인의 정치적 성공을 맞바꾼 위선자였을까?
IRA와 관련된 상세한 이야기들은 미국 보스턴 칼리지의 아일랜드 현대사를 구술로 남기자는 도전적인 프로젝트로 밝혀지게 되었는데 보스턴 칼리지는 과거 IRA 소속 전사를 통해 주요 인물들을 인터뷰하면서 인터뷰이 보호를 위해 인터뷰이 사후에 발표하고 역사적 사료로 쓰겠다고 했으나 과거사 정리와 이를 통해 제리 아담스에게 개인적 복수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 의해 IRA의 실종 사건에 관련한 소송에 얽히게 되고 이를 통해 일찍 세상에 공개되면서 그동안 숨겨진 이야기들이 세상에 밝혀지게 된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책의 도입부에서 소개된 진 맥콘빌의 실종과 살해에 관한 이야기였고 결국 진 맥콘빌은 실종 31년이 지나서야 유해를 발견하고 납치와 살해에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 제리 아담스도 진 맥콘빌 포함 여러건의 납치, 실종과 관련하여 기소되지만 정치인으로 변모후 IRA와의 관계를 모두 부인해온 그는 무혐의로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저자는 추가적인 탐문을 통해 여기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하고 실제 발포자에 대해서도 설득력 있는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너무 재미있는 책의 단 한가지 단점을 꼽으라면 책의 한글판 부제인것 같다. “북아일랜드의 살인의 추억”이라니 책의 가치를 현저히 떨어뜨리는 저 이상한 부제는 과연 누가 지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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